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량 해전 (문단 편집) === 명량대첩 이후 조선의 1차 공세 === 1597년 10월 17일(음력 9월 7일)의 [[직산 전투]]와 1597년 10월 26일(음력 9월 16일), [[명량 해전]]으로 육로와 수로에서 모두 '''일본군은 [[공세종말점]]을 맞이했다'''. 일본군 다이묘들은 가망이 없어진 전쟁에서 철수하고 싶었으나,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가 본국으로의 철수를 금지하였으므로, 남해안에 [[왜성(건축)|왜성]]들을 짓고 수비에 들어갔다. '''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려는 공세를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'''.[* 울산-부산이 장악당하면 순천-사천의 일본군은 일본으로 돌아갈 길 자체가 사라져 조선에 전군 투항할 수 밖에 없어진다.] * 1598년 1월 16일(음력 12월 6일), 조명연합군이 [[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]]를 벌여 소폭 성과를 얻었다. * 1598년 1월 29일(음력 12월 23일), 조명연합군이 [[울산성 전투]]를 벌였으나 공성에 실패했다. * 1598년 1월 말, 명나라 5만이 [[부산포왜성]]을 공격했으나 [[타치바나 무네시게]]의 방어에 공성에 실패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